책소개
슈토름이 살았던 19세기 독일은 큰 사회적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비록 주권은 여전히 군주가 잡고 있었지만 18세기까지 유지되던 신분사회가 계급사회로 바뀌고 합리적 행정 체제가 뿌리내렸으며, 지금과 같은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았지만 헌법과 의회가 존재하던 시대였다. 경제적으로는 도로·철도·운하 등의 확장 및 석탄·철의 생산과 소비 등이 두드러졌다. 슈토름의 ≪백마의 기수≫에서 중심 문제로 등장하는 제방 축조에서도 짚과 섶나무 대신 석층으로 호안 공사(護岸 工事)를 하고 증기를 이용한 버킷 준설기가 사용되는 등 기계화가 이루어진다. 공교육의 확대와 높은 교육열 역시 독일 근대화의 견인차 구실을 했으며 곳곳에 극장·박물관·미술관 등 문화 시설이 설립되었다. 1871년 비로소 역사에 처음 등장한 통일 독일은 이 시기의 비약적 산업화와 인구 팽창의 결과 경제력·행정·국방·외교·자연과학·기술 등에서 다른 제국들과 어깨를 겨루는 강국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대체로 보수적이었으며, 정치적 억압과 무기력이 지배하는 가운데 미미하게 자유주의가 발전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해안 지역의 지형과 제방 축조 그리고 간척지 개발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18세기까지 유럽에서는 전쟁·질병·굶주림으로 말미암아 주기적으로 인구가 감소했다. 유럽의 인구가 고대 이래 끊임없이 감소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에 대처하여 당시의 절대주의 국가들은 여러 가지 주민 정책을 펼쳤다. 계획적으로 외국인들을 자기네 영토 내에 옮겨 살게 하는가 하면, 조혼을 할 경우에 조세 감면이나 산아장려금 지급 따위의 조처를 취함으로써 자연스러운 인구 증가를 꾀한 것이다. 경제 이론가나 프리드리히대왕 같은 절대군주들도 많은 인구가 국가의 정치·경제·군사력을 키우는 근본 조건이 된다고 보았다.
중세 이후 독일의 인구는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새로운 경작지의 수요도 늘어났다. 이 문제의 해결책 가운데 하나가 15세기부터 해 온 간척 사업이었다.
간척 사업에는 제방 축조가 필수적이었다. 해안 가까운 곳에 섬이 없는 경우 방파제를 쌓아 봤자 몰아치는 파도에 제방이 상하기 쉬웠다. 때문에 파도를 막아 주는 섬이나 갯벌이 제방의 입지 조건으로 유리했다.
간척 사업은 중세 때부터 네덜란드와 북해 연안을 따라 널리 시행되었으며 1610년경부터는 투기 조짐까지 보일 정도였다. 소택지에는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를 입지 않도록 땅을 둔덕지게 돋우어 집터를 조성했다. 하우케·엘케 부부의 집이 있는 언덕이 바로 그런 곳이다. 그 아래에는 보통 도랑으로 경계를 만든 습지 풀밭이 있었다. 이렇게 형성된 소택지 촌락은 건조한 고지대 마을과 대조되기 마련이다. ≪백마의 기수≫에는 이러한 지형과 풍습, 북해의 개펄, 바다 풍경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200자평
독일 작가 테오도어 슈토름의 작품이다. 슈토름이 죽던 해인 1888년에 나왔다.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다. 사물과 상징이 하나로 승화된 사실주의 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 이중액자소설이다.
지은이
1817년 북해 연안의 후줌에서 덴마크인으로 태어났다. 후줌에서 초등학교와 김나지움을 다녔다(1826∼1835). 1835년에는 뤼베크의 카타리내움으로 옮겨 대학 입학 자격시험을 친다. 1838년에 베를린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으며, 이듬해에는 킬 대학으로 옮겨 학업을 계속한다. 1842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다음 해에 후줌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다. 그의 고향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방은 지리적·민족적으로 독일인과 덴마크인이 뒤엉킨 곳이었지만 법적으로는 덴마크 왕의 봉토였다. 1848년경부터 독일에서는 이 땅을 획득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돌기 시작했다. 슈토름은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1849년 ‘덴마크 왕의 지배에서 벗어나길 원한다’는 청원서에 서명한다. 그리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군대와 덴마크군이 싸웠으나 결국 덴마크가 이긴다. 이 여파로 1852년 변호사 자격을 빼앗겼다. 그러나 1864년에 프로이센-덴마크 전쟁에서 프로이센군이 이겼다. 슈토름은 후줌의 지방관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1867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프로이센에 합병되며 관직이 없어지자 지방법원 판사가 되었다. 1874년에는 부장판사, 1879년에는 지방법원 지원장으로 승진하지만 1880년에 아직 정년이 남았는데도 일찍 퇴직한다. 1887년 그는 위암에 걸렸음을 알게 되었고, 1888년 퇴직 이후부터 살아온 하데마르셴의 집에서 운명하여 후줌의 가족 묘지에 묻힌다.
옮긴이
1950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조선대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2000년에는 카프카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역서로는 프란츠 카프카의 ≪성(Das Schloss)≫, ≪페터 슐레밀의 신기한 이야기(Peter Schlemihls wundersame Geschichte)≫ 등과 로버트 발저, 릴케, 카프카, 클라이스트, 렌츠, 브링크만, 우베 팀 등에 관한 다수의 저술 및 논문이 있다. 강원대학교에 재직 중이다.
차례
백마의 기수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모두, 참아! 참으라고!”
하우케는 아래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소리쳤습니다.
“1피트만 더 높여. 그러면 이 홍수에도 끄떡없어!”
폭풍우가 울부짖는 소리 속으로 일꾼들이 일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개흙 덩어리가 털썩 떨어지는 소리, 수레바퀴가 덜거덕거리는 소리 그리고 위에서 던진 짚이 풀썩거리는 소리들이 끊임없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사이로 누런 강아지가 추위에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람과 수레 사이에서 이리저리 쫓기며 깽깽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는데, 갑자기 아래 구덩이에서 개의 비명 소리가 났습니다. 하우케가 내려다보니 누군가 강아지를 내동댕이쳐 굴러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에 불끈 노여움이 타올랐습니다.
“멈춰! 중지!”
그는 수레들이 있는 아래에 대고 소리쳤습니다. 젖은 진흙이 계속 돋우어졌기 때문입니다.
“왜요?”
아래에서 거친 목소리가 올라왔습니다.
“설마 하잘것없는 개새끼 때문은 아니겠죠?”
“멈추라고 하지 않았나!”
하우케가 다시 소리쳤습니다.
“그 개를 이리 데려와! 우리 공사장에서는 죄받을 짓은 안 돼!”
그러나 누구 하나 움직이지 않았으며, 다만 진득진득한 진흙 몇 삽이 더 깽깽거리는 강이지 위로 던져졌습니다. 이때 하우케가 백마에 박차를 가하자 말은 한 번 소리를 내지르며 제방 아래로 내달렸고 모두들 앞을 비켜섰습니다.